- 새별오름
11월, 아홉 달 만에 제주를 찾았다. 가족과 함께했던 2월과 달리 이번엔 혼자다. 바쁜 일도 어느 정도 끝났고 하니 며칠 혼자 바람 좀 쐬고 오라는 아내의 제안을 염치도 없이 덥석 물었다. 제주에 다녀온 지 오래된 편이 아닌지라 다른 지역을 돌아볼까 고민도 했었지만, 나도 모르게 왕복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있었다. 뭐, 가을 제주도 좋겠지. 지난겨울 못 가 본 곳도 많으니까.
제주에 도착해 지인을 만나 식사를 하고 ‘새별오름’을 찾는다. 이곳을 찾은 이유 몇 가지.
하나. 2월엔 아이가 있었고 추울 때였으므로, 오래 걸어야 하는 일정을 잡기 어려웠다. 본의 아니게 오래 걸은 곳이 없지는 않았지만 새벽의 성산 일출봉이나 수많은 오름들을 계획에 넣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새별오름은 첫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오름이었다. 이번 여행은 많이 걸어보려고 했다.
둘. 점심을 함께한 지인이 마침 “요즘 억새가 한창이라, 오늘 같은 날 해 넘어갈 때 새별오름 가면 너무 좋을 거예요.”라 말해 주었다. 정월대보름엔 들불 축제가 있고, 가을엔 억새가 유명하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원래는 이튿날 아침에 가려고 했던 곳이었는데 곧바로 내비게이션의 도착지를 새별오름으로 잡았다.
셋. 이름 때문이었다. 사실 첫날 숙소 가까이에 새별오름이 있긴 하지만, 다른 날 숙소에도 조금만 가면 오를 수 있는 오름들은 많았다. 그런데 새별오름을 선택한 이유는 순전히 이름 때문이었다. 중년 남성의 취향이 좀 웃기긴 하겠지만, “저녁 하늘의 샛별과 같이 외롭게 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명이 눈길을 끌었다.
20분 쯤 달리니 널따란 주차장 너머 새별오름이 보인다. 어르신으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들도 많고 날이 좋아서인지 가족 단위 여행객들도 제법 보인다. 왼쪽 길을 따라 천천히 오르는 길이 제법 가파롭지만 억새로 뒤덮인 오름과, 가끔 쉬면서 뒤돌아볼 때 펼쳐진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힘은 들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며 계속 오른다.
감귤 모자를 앙증맞게 쓴 어린이가 보인다. 동그란 주황색 모자의 꼭지에 초록색 잎이 두 장 달려 있는 모자다. 겨울 제주에 왔을 때 우리 딸에게도 저런 모자를 사서 씌워 주고 다녔다. 오늘 아침 딸내미는 일어나자마자 새벽같이 나간 아빠가 보고 싶어 울먹였다는데, 새로 사 준 만화책에 입이 벌어져 금세 해맑게 웃고 학교에 갔다고 한다. 부끄러워서 감귤 모자 못 쓰겠다고 하기 전에 꼭 다시 한번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정상까지 30분 남짓,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슬쩍 긴 줄 뒤로 달라붙어 본다. 20대의 나였다면 혼자서는 도무지 민망해 줄을 서거나 남들에게 사진 찍어달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내 앞의 20대 남학생들에게 점프까지 요구하며 사진을 찍어주고, 나 또한 독사진을 부탁해 한 장을 찍어 카카오톡 가족 창에 전송했다.
정상에서 한참을 구경하고 쉬다 내려가는 길. 좁은 길이라, 50대 중후반 쯤으로 보이는 부부의 대화가 들린다.
“여기 두 번째 오는 거잖아. 근데 왜 이렇게 힘들지?”
“말해 뭐해? 다음에 오면 훨씬 더 힘들겠지.”
10대나 20대의 나였다면, “다음에 오면 훨씬 더 힘들 것”이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30대가 되니 20대 때랑 완전히 달라.”라는 말을 나도 더러 했던 것 같지만, 40대 중반을 넘기며 느끼는 몸의 감각을 생각하면 30대 때 했던 저 말은 허풍에 가까웠음을 안다. 아마 50대, 60대가 되면… 나는 40대, 50대 때 뱉은 말들을 어리광으로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음에 오면…”이란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할지도.
가을 제주의 새별오름을 내려오며, 이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그리고 억새들 때문에 새별오름이 외롭지는 않겠구나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도 결국 “저녁 하늘의 샛별과 같이 외롭게 서 있다”는 것을 느낀다. 감귤 모자를 쓴 또 다른 아이 하나가 힘차게 올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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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기자 다른기사보기